미학과 정치운동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보다 전문화된 예술 정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담론에서도 사용되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의미의 다양성을 지닌다. 그것은 때로 간과된다 - 특별한 중요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용어는  {맥밀란 예술사전(Macmillan Dictionary of Art)}(1996) 32권에도,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New Encyclopedia Britannica}(1995)에도, 심지어는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높게 평가받은 {키워드: 문화와 사회의 어휘(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뿐만 아니라 20세기에도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규정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만들어가려는 시도들을 정의 내리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시작된 곳이고, 바로 그곳에서 아방가르드의 가장 폭발적인 해석들을 발견할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1973 판의 {소비에트 백과사전(Great Soviet Encyclopedia)}에서는 "아방가르드주의" "자본주의자와 쁘띠 부르주아 개인주의로 포화된 "으로써 아방가르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보다 최근에는, 페미니스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아방가르드가 엘리트주의를 조장하는 개념이라고 공격했다.

만일 우리가 지난 200 이상 전개되었던 "아방가르드" 간략히 정의하려고 한다면, 이는 사회에서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발전들을 변형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칭할 것이다. 때로는 보완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얽혀있고 어떤 때는 분리되어 심지어는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지기도 하며 미학적 혁신과 정치적 개입이 함께 아방가르드가 지닌 의미의 핵심에 파묻혀 있다. 앞으로 나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아방가르드의 기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발전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생각에는 아방가르드 내에서의 정치학과 미학 사이의 긴장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정치운동가들은 미학적 운동의 충격으로부터 매우 많은 것을 배울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이라 불리는 것은 완전히 비정치화 되었고, 그것의 본질의 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모더니즘" 보증으로서 인식되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모더니스트 전통의 강조점은  도덕성, 인간의 고통이나 정치라기보다는 미학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스트들은  감정적 경험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구성을 세속적 등가물인 "미학"으로 대체했다. 배치(constellation) 안에서 아방가르드 개념의 비정치화는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론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하면,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는 가지 특징이 있다.

1. 형식에 몰입
2.
사회적 삶의 다른 관심들로부터 예술의 자율성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것이 예술운동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을 명백히 드러난다. "현대" 이전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 여겨졌는데, 이는 소비주의와 대량 살상무기들이 아름다운 것들의 토대를 파괴시키고 사회의 존재를 위협할 단순히 미학적 가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분명한 모순에 대한 해결은 예술의 형식적 미학의 범위 내에서 진실은 사회를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르쿠제에게,

예술은 예술 자체로써의 언어와 이미지로써만 예술의 급진적인 잠재력을 표현한다예술의 해방적인 메시지는 절대 오지 않을 천년까지 지속할 것이다예술은  소외된 상태로 남아야 한다예술은 혁명을 나타낼 없으며 예술 자체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지배되어 정치적 내용이 메타정치적(정치철학적)으로 되는 미학적인 형식 안에서만 혁명을 불러낼 있을 뿐이다.

예술이 정치적 투쟁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상상력이 총체적으로 기능하는 , 도구주의적 이성의 하수인이 되는 "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방가르드의 어원

1825년에 프랑스에서는 생시몽(1760-1825) 자신의 저서 {문학적인, 철학적인 그리고 산업적인 의견들(Literary, Philosophical and Industrial Opinions)}에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생시몽은 예술가와 과학자 그리고 기업가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억압과 고립으로부터 인간성을 이끌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이들 가지 유형의 대표자들간의 가상 대담을 썼다. 그리고 예술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뭉칩시다. 우리의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별적 과업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예술가는 아방가르드로서 복무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있는 모든 무기 중에 예술의 힘은 가장 빠르고 신속합니다.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개념을 펼치고 싶을 우리는 번갈아 가며 서정시, 송시 또는 노래, 이야기 또는 소설을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대리석이나 캔버스에 쓴다...... 우리는 가슴과 상상력을 목표로 함으로 우리의 효과는 가장 선명하고 가장 결정적이다.

아방가르드 개념은 혁명적인 정치와 아카데미(예술원) 예술 지배에 대한 문화적 저항 환경의 교차점으로부터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내가 다음에서 논의할 것처럼, 1820년대부터 1930년대의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용어에 적용되는 당대의 관습적인 의미에 반대되었다.

구스타프 꾸르베(Gustave Courbet) 1840년대의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프랑소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예술이 사회에서 해방적인 역할을 있다는 이념의 초기 옹호자들이었다. 1849년에 그려진 쿠르베의 기념비적인 그림 '돌을 부수는 사람들(Stonebreakers)'은―그 해는 대륙혁명운동이 실패한 일년이 지난 때―정치 아방가르드주의의 기준으로 작용해왔다. (덧붙이면, 나는 그림이, 영국 왕실 공군이 독일 드레스덴을 파괴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소이탄을 사용한 때인 1945 2 14일에 훼손되었다고 써야만 한다.) 문학에서 위대한 낭만주의자 쉘리는 詩人이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라"라고 썼고,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eau, 1854-1891)) 그의 시에서 사회적 관심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품고 있을 아니라 "감각의 무질서" 통해 구조 속에서 권력의 경쟁을 표현하는 시구를 창조하려고 했다.

1848 맹렬한 바리케이트 전투 이후, 1860년대 남작 오스만(Baron Haussmann) 설계에 따라 빠리는 재건되었다. 노동계급은 그들의 주변화를 상징하는 방리유(도시외곽) 이동했다. 신부르주아의 소비주의 문화는 특히 술집, 댄스홀 그리고 까페 미리 포장된 "향락" 팔릴 있는 곳에서 번창하고 깊숙이 스며들었다. 시기 프랑스 예술에는 이런 부분이 대게 드물었지만, 시기의 결정적인 사건은 1871 5 25,000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유혈진압 파리꼬뮌이었다. 꼬뮌 동안 꾸르베는 예술인 연합의 창시자들 가운데 명이었다. 게다가 그가 바로 나폴레옹 승전에 바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던 쁠라스 방돔에서 건축물의 기둥을 부수는 계획을 실행하고 옹호하는 일조한 사람이었다. 비록 꾸르베가 코뮌의 막바지인 '피의 일주일' 동안 살아남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혔고 그의 작품들은 전시가 금지되었다. 재정적으로 파탄이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후에 생을 마쳤다.

우리는 꼬뮌 이후 뚤루즈 로트렉, 르누와르, 드가에 의해서 그려진 프랑스의 즐거운 모습을 아주 알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 미술 시장에서 아주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꼬뮌 이후 당시 빠리 사람들이 가졌던 즐거움은, 모든 광기와 야만이 우리를 둘러싸더라도 우리 자신을 즐기라고 상기시킨다. 이러한 작품들은 아주 옛날의 시대의 추억인데 지금 범죄율이 치솟고 자동차와 같은 현대적 편의시설들이 사회풍경을 해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킨 오늘날의 도시거주자들에게는 아직도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승리한 부르주아가 예술을 전유한 맥락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거의 예술에 관계없이 사용되었고, 급진적 극우주의자와 극좌주의자 사이에서만 의미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빠리인들 삶의 새로운 즐거운 현실을 그린 에두아르 마네(1832-83) 그림은 가지 모순된 의미의 아방가르드를 결합했다고 오늘날 점차 재해석되고 있다( 가지 의미란 미학적 혁신과 사회적 참여이다). 마네의 형식적 진보주의는 꾸르베의 계급투쟁 참여와 종종 비견된다. 그래서 마네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기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많은 사회적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1878 'Rue Mosnier with Flags'에는 빠리의 풍경이 1878 6 30 축제인 'Rue Montorgueil'와는 다르게 암울하며, 같은 끌로드 모네도 이와 유사한 그림을 그렸다. 꼬뮌 이후에 빠리를 그린 모네의 작품은 머리위로 깃발을 나부끼며 뛰쳐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용맹성을 묘사하는 반면, 마네는 다리 하나밖에 없는 노인의 뒷모습을 그린다. 노인은 지팡이로 절반은 황량한 거리를 힘겹게 걸어간다. 프랑스 국기가 나라를 축하하는 협박성 복장처럼 무시무시하게 허공에 매달려 있다. 꼬뮌 시절에 마네가  Parisian national Guard 재직했던 것이 마네의 모더니즘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 거의 언급! 되지 않지만 의심할 없이 작품에 영향을 끼친 인자다. 이를테면 같은 그려졌던 The Barricade and Civil War 같은 작품이다.

인상주의가 출현하면서 거의 스캔들로 비견될 정도로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환영과 야유를 동시에 받았다. 심지어 프랑스 입법부는 인상주의 작품전전 공공자금이 투입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모더니스트들은 이것을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감각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는 예술일 뿐이고 그것의의 인기는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맥락에 넣음으로써 있다. 그것의 과학적 리얼리즘과의 형식적인 거리는 감각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아방가르드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다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나키즘과 아방가르드

인상파와는 대조적으로, 후기인상주의 화가들 까뮤 피사로(1830-1903), 시냐크(1863-1935) 그리고 여타의 아나키스트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예술과 정치를 통합하려 했다. 특히 시냐크의 경우, 점묘법과 같은 급진적인 테크닉을 통해, 예술가들이 "대자본에 대해 노동자들이 대항하는 사회적 변화를 목도하고 있음" 나타내었다. 시냐크는 (푸르동과 같은 정치운동가들이 옹호했듯이) 내용 면에서의 급진적 예술의 축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는데, 대신에, 혁명은 "순수미학에서 더욱더 강하고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주택문제와 같은 주제에도 적용된다.... 그보다도 데카당스의 쾌감을 종합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시기 아방가르드 예술과 아나키스트들과의 친밀성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깊다. 파블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나키스트 그룹에 있다가 1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 동안은 몽마르트에서 이와 비슷한 그룹들에 참여했었다. 영국 작가인 체스터톤(G.K. Chesterton) 1908년에 "예술가는 무정부주의자와 동일하다" 말했다. 1905 Salon of Autonomy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Fauves('야수파') 생각하든, 헨리 마티즈(Henri Matisse, 1913 시카고 예술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그의 작품 Blue Nude 모방품이 불에 적이 있다) 겉보기에는 비정치적인 작품들에 내포된 "문화적 가치들에 대한 무정부주의적인 위협" 생각하던 간에, 아방가르드 예술에 내포된 무정부주의의 위협은 당시에 상당히 실재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큐비즘(입체파), 500년이 넘는 동안 유럽의 예술을 지배했던 과학적인 원근법을 급진적으로 해체했다.

입체파가 제기한 문제들 하나는 관객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어떻게 예술가들이 시각적 표현의 구도를 바꾸어서 의식을 변화시킬 있단 말인가? 소비사회에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는 인상파와는 달리, 입체파는 이해되기 전에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피카소의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의 경우 처음에는 일반 대중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피카소는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동안 침실에 숨겨놓았다. 하지만, 거의 세기가 흘러 입체주의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이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졌음을 있다

1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10분의 1 죽고 유럽 제도들의 야만성이 드러나자, 예술은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낳은 규율 중심적 사고방식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다이즘을 통해 부르주아의 규율에 근본적으로 대항했다. 유희, 무작위 선택, 그리고 자발성은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주요 가치들로 여겨졌다. 캔버스 위에 표현하는 대신, 다다이즘은 유럽 문화의 "문명화된 야만" 대한 혐오를 나타내기 위해 콜라쥬, 음악, 영화, 사진, 조각 등과 같이 가능한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대항했다. 그들은 "예술과 함께 밑으로 내려가라!"라고 소리쳤고, "다다이즘은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의 편이다" 외쳤다. 이들은 "소수의 강도들에게 넘어간 세상의 파괴적인 광기" 파멸을 요구했다. 움직임들이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이것은 점차 소위 '독일 볼세비즘'으로 불리는 급진적 공산주의와 섞이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뒤를 이은 내전기간 동안, 추상예술의 새로운 언어는 반혁명을 격퇴시키기 위한 투쟁 동원되었다. 혁명이 굳건해지면, 새로운 사회 건설에 맞추어 구성주의가 예술 운동으로 부상했다. 다른 어떤 아방가르드 형태의 예술보다도 조직적이고 기술적인 구성주의는 개의 상이한 요소들에 의해 침식되었다. 한편으로 구성주의는 "기능을 따라가는 형식"이라는 바우하우스적 사고로 변형되면서 순수하게 실용주의적인 노력으로 감소되었다. 더욱 불길하게, 소련의 처음 년간 극명했던 분투가 반혁명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들이 스탈린의 숙청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사회 현실주의가 예술에서 허용되는 하나의 양식이 되고 말았고, 소비에트 정부는 모든 형태의 아방가르드주의를 비난했다. 1932, 모든 예술가 그룹들은 합법적으로 해체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이즘과 구성주의의 -개인주의를 부정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급진적이고 정치적 사고들이 이들의 미학을 알려주었다. 최초의 초현실주의자 잡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혁명}(The Surrealist Revolution)이었고, 번째 저널은 {혁명에 복무하는 초현실주의}(Surrealism in the Service of the Revolution)이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의 발견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문화적 상품화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비판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꿈과 환상을 그렸다.

형식주의 예술사는 추상과 입체주의를 강조한 반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그리고 구성주의는 무시했다. 그러면서 아방가르드나 '근대' 예술은 정치적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관념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그리고 구성주의 모두 아방가르드를 원래 -시몽주의의 뿌리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시도는 미학적 혁신을 사회질서의 급진적 비판과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구성주의는 "제도로서 예술의 파괴는 일상적인 삶의 실천으로부터 출발한다" 것을 추구했다. 이것은 고상한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예술을 정치로부터 갈라놓으려는 모더니스트들의 충동은 둘을 기계적으로 통합하려는 사람들만큼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구성주의의 경우에서 보면, 이러한 운동들은 정치적인 일과 미학적 혁신 사이가 다시 활기 있게 했다.

현재의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가 다시 나타나게 2 세계 대전이후, 미학적인 형식주의와 정치참여는 다시 거리가 있게 되나, 아트, 미니멀리즘, 추상적 표현주의, 개념주의 예술, 액션 페인팅 등은 공공연한 정치적인 주제들이나 자극과는 거의 관련이 없으며, 그들의 미학적 발전에 대한 정식의 기여도도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만일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주의(우파로는 이탈리아, 좌파로는 러시아식 버전을 모두 포함) 미학적 정치적 관여를 보다 최근의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냉담하고 소비중심주의적인 실천과 비교하게 된다면, 대비는 아주 놀라울 것이다.

시대의 정치운동들은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수많은 미학적 차원들을 일상생활을 변형시키려는 그들의 현실적인 시도에 동시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나는 여기서, 네덜란드의 Provos(과격파), Orange Free State, Kabeuters 그리고 프랑스의 상황주의자(Situationist) 322 운동, 독일의 전복적 행동(Subversive Aktion), 미국의 Diggers Yippies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 집단들의 몇몇의 뿌리는 내용 없는 형식주의적 발전으로 인하여 공허하게 예술에 다시 기력을 넣어주려 하였던 예술 운동인, Fluxus로까지 연결될 있다.

위에 지명된 정치적으로 관여된 집단들은 일상생활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예술의 미학적 형태를 변경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실존(people's existence) 문법을 변형시키려고 하였다. Yippies들이 뉴욕 증권거래소 마루에 돈을 던졌을 , 이것은 아주 뛰어난 다다이즘적인 행동이며, 이는 때문에 종종 거리는 브로커들에게 거래를 중지시키도록 하는데 성공했을 아니라, 폭넓은 홍보효과를 얻을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1968 미국 대통령선거에 돼지 마리를 출마 시켰을 , 이들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정치인들의 이미지 계산법을 영원히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Stew Albert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71 독일에서, 나와 제리 루빈(Jerry Rubin), Phil Ochs 그리고 꽁방디(Daniel Cohn-Bendit) 며칠 동안 같이 돌아다녔다. 우리는 아주 절친했다. 꽁방디는 내가 보안관에 출마했었다는 것을 좋아했으며, 우리가 모두 서부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Kabeuters냐고? 정말 우리는 며칠 동안을 그들과  인도네시안 잔디와 (Indonesian grass)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지냈다. 그들은 Orange Free State-일종의 Woodstock 국가- 결성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비록 Jerry 내가 Provos 의해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당신이 위에서 언급한 다른 집단들로부터의 연락이 없었다.

Yippies들은 Mad Magazine, 아르또(Artaud), 쉐퍼드(Jean Shepard),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에서부터 다다와 초현실주의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모이게 있는, 그리고 이것들을 특이하고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배열해, 충격을 주고, 주의를 모으며, 쟁점으로 있는 감각이 있었다.

우리는 TV 의식의 확장이 되었으며, 이제는 공동의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목적은 이미지들을 아주 특별하고 즐겁게 만들어서(부자들의 증권거래소에 돈을 던지고, 대통령선거에 돼지를 출마시키는 ) 이들이 TV 나오게 하여 대중 사고의 중독된 형태를 전복시킬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리와 물체를 TV 이미지 창조를 위한
수없이 많은 야외 소품으로 만들었다

Yippie들은 소그룹 활동들이 현대 사회의 변형을 위해서는 정치 정당보다 적합한 방편이 있다는 개념을 가져왔다. 1968 5 학생 운동이 프랑스 전역에 전파되었을 , 소수의 나이든 활동가들 모임이 갑자기 소르본느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소르본느는 운동의 중심 모임장소 아니라 노동자들과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게 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1,000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프랑스를 거의 혁명직전으로 까지 몰고 갔다. 이는 소그룹의 아방가르드 행동이 이동과 운동을 촉발하게 되는 20세기에서, 우리가 지적할 있는 하나의 예이다. 이들은 미학에서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현재 사회의 역학은 일상생활의 예술화를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 내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의 자율성은 자유롭지 않은 사회에 살고있는 개인들의 부자유를 반영한다. 만일 사람들이 자유롭다면, 예술은 그들의 자유의 형식과 표현이 것이다. 예술은 비자유에 의하여 드러나게 되며, 부자유를 반박하면, 예술은 자율성을 얻게 된다.